기획자와 스토아철학

기획자로서 일을 하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우울할 때가 있다. 그 우울함이 심해지면 ‘나는 과연 필요한 존재가 맞는가?’라는 생각까지 들곤 한다. 이미 과거부터 많은 선배 기획자들이 그런 고통을 겪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기획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문제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할수록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겪어온 경험을 토대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도 상처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주니어 기획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주니어 시절, 내가 자존감을 많이 잃었던 Case

기획자는 정말 필요한가? 난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맞는가?

  • facebook, 우버 디자이너에게 UI 컨설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비스 기획자가 무엇인지 몰랐다. 왜 그들은 기획자라는 직군을 모를까? 혹시 필요없기 때문은 아닐까?
  • 기획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것이 전문성이 있는 직무인지 의문스러웠다. 비슷한 사이트를 파워포인트로 그리면 되는 일 같았다. 솔직히,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기획을 해도 잘 할 것 같았다.
  • 디자이너, 엔지니어의 의견에 따라 기획서가 아주 쉽게 변경된다. 디자이너의 의견에 따라 UI가 변경되고, 엔지니어의 의견에 따라 기능이 축소된다.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정말 기획서가 필요한 것인가? 기획자는 필요한 것인가?

예민한 성격의 엔지니어 혹은 디자이너! 그리고 그들에게 요청을 해야하는 기획자!

기획자는 업무 특성상 이리저리 요청을 해야한다. 사실 Product이라는 것이 기획자/디자이너/개발자 모두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요청’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기획자는 요청을 해야한다. 문제는 가끔씩 너무 예민한 엔지니어 혹은 디자이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청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예민함에 아무런 이유없이 주눅들 수 밖에 없었다.

  • 어떤 엔지니어는 내가 기획서 리뷰후 예상 가능한 일정을 물어봤더니, ‘개발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개발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라’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답변을 하여 나를 ‘개발을 쉽게 보는 사람’으로 낙인찍은 사람도 있었고
  • 어떤 디자이너는 기획서에 텍스트가 너무 많아서 복잡하니, 디자인 관점에서 심플하게 개선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아이콘으로 텍스트를 대체하였다. 나는 그 디자이너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면서 다시 수정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감정노동을 해야했다.
  • 정말 나쁜 엔지니어도 있었다. 사람마다 어떤 대표적인 특성이 있다. 피곤한 사람, 게으른 사람 등.. 그런데 그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이 있었다. 그 FE 엔지니어는 나에게 UX는 자신이 전문가이니 함부로 화면설계를 해서 자신의 사고력을 저하시키지 말고, 요구사항만 작성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선 알았다고 했는데…문제가 발생했다. 화면을 그리지 않고, 내 의도를 설명하려니…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약간의 화면설계를 했더니…그 엔지니어는 불같이 화를 냈다.

엔지니어보다 도메인 지식이 부족한 내가 너무 초라할 때

처음으로 쇼핑몰 기획을 할 때였다. 기획서를 엔지니어에게 리뷰했다. 엔지니어가 여러가지 case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나는 답변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그런 case를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 기획자들이 기술적 지식의 부족이 자신의 부족함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도메인에 대한 지식부족이 훨씬 더 치명적이다. 도메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기획자….이 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나는 필요한 사람인가?”

상황 자체보다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에 집중해보자.

이렇게 나는 상처난 곳에 딱지가 앉기도 전에 계속 상처가 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떨어지면서 더 강해진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딱지가 생기기도 전에 계속 똑같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어느순간 소프트웨어가 싫어졌다. 이쯤되니, 나는 선택을 해야했다.

  • IT 업계를 떠나 다른 직무를 하거나..
  • 이 상황을 극복하거나…

그런데 피하는 것은 옳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이런 상황은 다른 직무에서도 또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문제를 피하는 것 자체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고민해보다가…아래와 같이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진리(?)를 떠올렸다.

어차피 현실에서 발생하는 상황은 내가 제어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

사실, 이 생각은 ‘직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도출된 결론인데, 직언이라는 책에서는 스토아철학을 우리 생활에 어떻게 잘 적용할 수 있을지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지금은 절판된 상태라 아쉬움이 크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책에 잠깐 나오는 그 스토아 철학을 통해 나 자신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었다.

스토아 철학을 잘 설명해주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스토아 철학이 정의하는 좋은 삶이란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덕이란 인간 본연의 기능으로서 인간 본연의 기능은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갖춘 사회적 존재가 되는 것이 스토아철학의 주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우리 뜻대로 해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에 비례한다.

당신이 원하지 않은 이상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 주는 일은 없다. 당신이 상처받는 때는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다.

“모욕적인 것은 당신을 괴롭히거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모욕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당신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화나게 하는 것은 화를 나게 한 그 원인들에 있는게 아니라, 이러한 것들에 화가 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판단에 있다.”

성가신 사람을 대할 때 정작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실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자신의 짜증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스스로의 짜증을 다스리지 않고 계속 짜증을 낸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에픽테토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큰 위험은 증오다. 증오는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따라서 싫은 사람들을 향한 자비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아우렐리우스

나는 직언이라는 책을 통해 스토아학파를 아주 얕게라도 접할 수 있었고 이 부분은 내 생활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혹시 직언이라는 책의 주요 내용이 궁금하다면, 기존 포스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서비스 기획에 대한 직무를 다시 정의했다.

기획자는 훌륭한 기획서를 작성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으로 재정의 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기획서의 디테일보다는 문제정의와 목표설정에 더 많은 집중을 했다. 그랬더니, 다음의 변화가 있었다.

  • 목표가 명확하고 그에 대한 UX전략이 도출되니, 불필요한 논쟁이 줄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모두 주관적 취향을 우선시한 업무방식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 그 아이디어와 논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획서는 더욱 구체화되어갔다.
  • 어차피 나는 문제정의와 목표설정에 집중을 했기 때문에, 기획서가 많이 변경되어도 나 스스로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문제정의와 목표설정에 집중했더니 자연스럽게 도메인에 대한 지식이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 그랬더니…’나도 필요한 사람이구나! 서비스 기획자가 필요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스토아 철학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내가 실제로 대머리인데 누군가 나를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생각해보자. 세네카는 이렇게 물었다. “어째서 자명한 사실을 듣는 것이 모욕인가?”

세네카

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해도 그냥 있는 그대로(사실 기반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으로부터 불편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 상대방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부족한 점이 드러나면…그대로 받아들여 내가 변화하면 된다.
  • 상대방의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라면…틀린 내용에 대해서 사실기반으로 알려주면 된다.
  • 난 그냥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만 집중할 뿐이다. 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그 이후로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 주변 동료들로부터 나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예민한 사람들도…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오히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예민함을 줄이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자신의 불편한 이야기를 통해 나오는 상대방의 감정적 반응이 그들에게는 스트레스인 것 같았다. 즉, 그들 스스로는 자신이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그런 반응들이 불편했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감정적 반응을 하지 않으니,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난 멘탈이 강한적도 없고,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크게 노력한 적도 없는데…..그럭저럭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물론, 소수의 동료평가로 일반화 시킬 수는 없을테지만…)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꽤 많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 어차피 상황은 내가 제어할 수 없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현실적이다.
  • 불편한 상황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문제해결에 집중한다.
  •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최대한의 방어는 내가 예민해지지 않는 것이다.
  • 불편한 현실에 대한 자신만의 대처 방식이 필요하다.

    어차피 위 내용들은 내 경험일 뿐이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일 수 있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이렇다.

    만약, 당신이 어떠한 이유로인해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라면…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책이나 영화일 수도 있고, 지인의 조언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 한 가지를 찾았다고 해서 갑자기 행복해진다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절대로 빠르게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한테 맞는 방법을 잘 찾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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